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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노멀 시대 - 소소한 일상

박 재 영 | Park, Jae Young

2021.4.12 - 5.15

인생은 잘 짜인 한 벌의 스웨터
박재영의 그림을 읽는 시간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옷장에서 소매 끝이 닮아버린 스웨터 한 벌을 꺼냅니다. 6년 전 여름 홍콩에 출장 갔다가 세일에 싸게 산 제품인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기본적인 디자인에 짙은 네이비블루 색상이어서 아무 옷에나 무난히 어울리기 때문이지요.

올 하나하나가 시간의 흐름 속에 부식되어 부풀이 생겼지만, 체온을 유지하도록 외부와 내부 사이를 흐르는 따스한 공기를 머금는 함기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니트는 적당히 늘어나도 좋습니다. 신체의 움직임을 따라 우연하게 몸을 감싸니까요. 스웨터를 입어본 본들은 압니다. 인간의 체온으로 덥힌 따스한 공기가 몸의 구석구석을 순환하도록 외부의 아픔과 상처를 차단하는 것은 균일하게 배열된 올들의 힘인 것을 말입니다.

예전 저는 전문적으로 패션 구매업무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옷의 제작과정 전반을 배워야 했습니다. 옷을 포함한 모든 오브제는 최종적으로 인간의 손에 쥐어지기 전까지의 과정을 알아야만, 그 물건에 담긴 의미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옷이란 사물의 첫 출발은 어디일까요? 목화건 양털이건 인간의 옷이 되기 위해서는 ‘실Thread'이란 형태로 변모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는 모든 옷은 실을 통해 구성된 세계입니다. 실은 우리가 입는 모든 옷의 우주를 짓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실은 여러 개의 실이 만나서 결합되는 ’꼬임‘의 과정을 통해 태어납니다. 그 꼬임의 방식에 따라 실의 강도와 부드러움, 표면의 느낌에 차이가 생깁니다. 우리네 삶도 그렇습니다. 나와 같은 빛깔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줄을 지어 내 편이 되어주고, 나와 같은 꿈을 공유하며 앞으로 함께 나아갈 때, 그 꼬임의 촘촘함은 꿈의 진정성을 강화시켜주지요. 실Thread에는 실로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옷을 만드는 재료 외에도 인간의 생명, 이야기와 맥락이란 뜻이 담겨있답니다.

스웨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신기합니다. 실의 고리를 만들고, 이 고리에 실을 건 후 새 고리를 만드는 걸 계속해서 반복하지요. 14세기경 북유럽 항구 지역 여인들의 손에서 짜이기 시작한 이 니트는 원래 물고기를 잡는 어망의 형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방한용 니트 스웨터는 특히 추운 겨울의 칼바람을 막고 습한 기운에서 인체를 보호해주는 기능을 했기에, 많은 여성들이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나 애인을 위해 부적을 그리듯 한 땀한 땀 손으로 스웨터를 짰다고 합니다. 스웨터를 짜기 위해 실 한 올 한 올의 고리를 서로 엮어야 하듯, 인간과 인간의 고리가 엮어져 촘촘한 관계의 망을 만드는 원리가 들어있음을 배웁니다.

저는 2009년에 <하하 미술관>이란 한국의 현대미술작품을 다룬 책을 쓰면서 화가 박재영의 그림을 제일 첫 번째로 내걸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제겐 니트를 짠다는 것의 의미를, 한 올의 세계에 담긴 우주를 설명해 준 작품이었습니다. 이후 연락이 없던 작가의 개인전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습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다보니 개인전을 여는 시간의 여백이 깊다"고 짧게 답하시더군요. 사실 그에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될 터였습니다. 그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화가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화가 박재영은 호수가 큰 캔버스를 사용하여 특유의 올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면 전체에서 느낄 수 있듯, 정교하게 재현된 옷감을 그리기란 매우 어렵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에요. 작가가 옷과 그 조식을 이루는 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그의 성장 과정을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목상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다양한 옷감들과 친숙해질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작가는 올을 그리는 행위가 삶의 과정을 현재와 결합시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올을 구성하는 실은 꼬임을 통해서만 그 기능을 다할 수 있고, 올 또한 고리 구조를 이루어 서로 연결되어야만 겨울철 차가운 기운을 견뎌낼 한 벌의 스웨터가 만들어집니다. 그 속에는 따스함과 눈물, 기쁨과 분노, 사랑과 같은 다양한 감정의 층위가 하나의 무늬가 되어 아로새겨집니다. 실과 실이 수직과 수평으로 만나 만들어내는 한 장의 직물Fabric에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과 관점’이란 뜻이 담겨 있는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그가 한 올 한 올 그려낸 울Wool은 작가가 표상하려는 세계의 풍경Scape을 포착하는 렌즈와 같습니다. 이번 신작들이 과거의 올을 그린 그림들과 다소 다른 점도 저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과거의 그림들은 옷을 구성하는 올 자체의 면밀하게 누적된 양상을 담는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번 그림들은 결국 그 옷을 입은 인간들의 포즈와 제스처가 담겨있습니다. 옷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내면 표정의 일부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살아가며 때로는 삶이 실타래처럼 엉킬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다시 풀어서 올의 고리를 만들어야만 새 옷을 짤 수 있지요. 제가 아침마다 그의 그림을 보며 묵상하는 이유예요. 가지런히 배열된 저 올들의 무늬를 보세요. 힘겹지만 하나하나 애를 쓰며 나아가는 저 실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일상을 횡단하며 살아내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