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SPACE KC
동사로서의 페인팅
페인터는 매순간을 불확실성과 맞서야한다. 페인터의 기술이 원숙하면 할수록 이런 불확실성에 기민하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페인터가 자신의 물적 기반을 알아 가면 갈수록, 물질이 자기 스스로의 법칙만을 따르려고 한다는 점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팔레트 위에서 페인트를 섞는 과정에서, 혹은 페인트를 캔버스에 바르는 터치에서 의도는 항상 옅어지거나 배반당한다. 그러니까, 페인터는 미리 상정해 놓은 어떤 형태의 이미지도 절대로 손아귀에 꽉 쥘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페인팅과 마주하는 페인터는 상당히, 항상, 불안정성에 내몰려 있다. 그 이유는, 거듭, 페인팅의 물적 토대와 페인터의 몸이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페인터가 표현 것은 그래서 사실은, 표현 것이기도 하다. 화가는 브러시로 그리는가? 아니면 브러시와 페인트가 캔버스 표면의 마찰을 가로질러 움직인 궤적을 따라잡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가? 매순간 페인터와 물적 토대는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페인터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런 불안정한 관계 자체일 것이다.
스트로크와 터치는 말하자면, 같은 것을 시차적으로 본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페인터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물질을 조작하는 행위가 스트로크라면, 터치는 그 행위의 기댓값이자 물질적 결과로서 행위를 촉발하는 원인이다. 즉, 스트로크는 터치를 생산하며, 터치는 스트로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언제나 통약불가능성이 흐른다. 스트로크는 제일 처음 출발부터 터치를 만족시킬 수 없다. 완벽한 터치란 존재하는가? 의도와 효과, 원인과 결과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페인터는 단 하나의 터치만으로도 부족함 없는 경지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성취를 이룬 페인터라면 더 이상 또 다른 페인팅을 제작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추가적인 의미를 두기는 힘들다. 이미 그는 거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 장소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말은 곧 페인팅, 나아가 페인터의 죽음을 뜻한다. 그 때문에 이우환은 터치의 정수를 추구했음에도 망설였고, 이내 그것의 무수한 변종을 만들었다. 표면과 서포트를 극단적으로 강조했던 구미의 1950-60년대 페인터도 텅 빈 캔버스를 내 놓을 만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는 내가 알기론 없다. 페인터와 페인팅은 모두 죽음에 강하게 이끌리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은 곧 페인터와 페인팅은 모두 살아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때문에 스트로크는 터치를 부르고 터치는 스트로크를 부르고 하나의 페인팅은 기어코 다른 페인팅을 불러낸다. 항상 스트로크와 터치는 항상 기대와 실망이라는 양가감정을 한꺼번에 분출하며, 그런 한, 스트로크와 터치는 무한한 결핍의 생산지이기도 하지만, 꼭 그만큼 미래로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것이 동사로서의 페인팅이다. 페인팅은 정지한 사물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스트로크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유발하는 터치의 집합이다. 이 우글대는 터치는 실로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페인터가 또 다른 스트로크를 결심하게끔 만드는 몹시 유혹적이면서도 괴로운 원천이 된다. 이 말은 페인터가, 우리가 끊임없이 페인팅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페인팅에 고정된 역할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적 프로그램은 종국엔 모두 실패할 것이다. 거듭 그래서, 그런 프로그램 때문에 페인팅을 두려워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더욱 없어 보인다. 그보다 우리는 페인팅을 향해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페인팅은 이미, 바로 여기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8.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