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SPACE KC
장영애-일상의 편린이 교차하는 무대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장영애는 한지에 채색물감을 통해 부드럽게 착색된 색을 안긴다. 한지의 표면에 스며든 은은하고 온화한 이 색상은 정치한 묘사와 초현실적인 상황설정과 맞물려 약간은 낯선 감각을 발생시킨다. 이 채색은 수채물감이나 과슈의 맛과도 같은 것을 전해준다. 그래서 일반적인 채색화와는 다소 다른 느낌이다. 표면을 단단하게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내부로 연하게 스며들어 퍼지면서 은은하고 감성적인 표면을 펼쳐놓고 있다. 깊이가 아니라 수평으로 확산되는 채색이다. 그러니까 채색물감을 농담과 삼투의 맛으로 우려내고 있어서 비교적 투명하고 맑은 분위기가 안개처럼 퍼져있다. 따라서 정통 채색화와는 다른 맛, 감각을 지녔다. 그로인해 색채 구사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그래서 그림에서 우선적으로 돋보이는 것은 색채감각이다. 불투명하고 깊게 우러나는 채색과는 달리 수채화처럼 다루어지는 이 채색법은 또한 꼼꼼하고 사실적인 재현으로 견인되면서 개별적인 사물들의 질감, 색채 등을 무척 회화적으로 길어 올린다. 채색물감을 수채화처럼, 서양화 기법으로 구사하고 있고 명암과 입체감이 두드러지는 세부묘사가 전통적인 재료체험과 공존하고 있다.
장영애가 그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접한 모든 것들이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주치는 일상의 장면들과 그로인해 불거진 여러 의식, 감정, 기억, 상상 등을 종합적으로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놓여 있다. 그것은 상당히 우발적인 삶에서 그때그때 접촉되는 다양한 장소, 사물, 인간들로 인해 생성되는 의식의 흐름을 이미지화시켜 내는 일이다. 특정 대상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식 안에서 흘러 다니는, 흩어지는 모든 것을 형상화해내는 일에 가깝다. 그것은 언어와 문자의 덫에서 유유히 빠져나가기에 그림으로밖에는 그리기 어려울 수도 있고 그림으로도 명확하게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여러 이미지를 결합시켜 이야기를 구술하려는 의도 안에서 구성된다. 낱낱의 이미지들은 단어처럼 혹은 순간순간 떠오른 영상, 어디선가 보았던 희미해진 잔상들, 우발적인 연상 등을 암시한다. 그것은 현실계에 수시로 침입하고 틈을 벌이는 무의식, 온갖 상상들을 따라가는 흐름의 이미지화인 듯 하다. 따라서 그림은 매우 사실적인 대상과 그로부터 발아한 초현실적인, 상상력에 힘입은 또 다른 존재가 마구 접목되면서 불거진 모종의 형국을 풍경처럼, 이상한 풍경으로 펼쳐낸다. 중력의 법칙이나 원근법적 구도는 붕괴되고 이질적인 것들의 혼재, 부유, 낯선 것들끼리의 결합, 왜곡과 과장, 연극적인 장면 연출 등은 그로인해 가능해진 것들이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형상에 느닷없이 불거진 또 다른 초현실적인 상황이 한 몸으로 밀고 나온다. 그것은 마치 콜라주와도 같은 연출이자 데페이즈망에 가깝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인지가능 한 대상이자 동시에 매우 암시적이고 우의적인 맥락이 ‘교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공간이 뒤섞이고 현실계와 초현실계가 공존하고 사실적인 세계와 초현실적인 세계가 동거하며 의식과 무의식이 길항하는 편이다. 이러한 연출은 아마도 영상과 컴퓨터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이미지 체험과 맞닿아있다. 자유롭게 일상의 편린을 긁어모아 재배열하고 그 안에서 낯선 이미지를 배양하는 식이다. 수집과 편집, 재배치, 조합이 무한히 가능해진 이 시대의 회화적 연출이다.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상황은 거의 꿈과 같은 몽상의 장면들이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언어에 의해 온전히 기술 할 수 없는, 다만 이미지로만, 빠른 속도로 소멸하는 영상처럼 흘러 다니는 ‘그것’을 애써 건져 올릴 뿐이다. 작가는 이를 연극무대처럼 재연해내고 있다. 사실적인 묘사와 습한 채색, 모호한 상황으로, 은유적인 도상들로…
근작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에 좀 더 몰입하고 있어 보인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작가 자신의 분신처럼 빈번하게 등장하고 화면 속의 공간, 즉 정원(땅과 나무, 풀 등이 있는 장소)이나 실내풍경에 자신이 일상에서 겪어낸 여러 경험과 그로인해 수시로 떠오르는 ‘또 다른 생각’(작가노트), 감각을 여러 사물들을 혼재시켜 그려내고 있다. 예를 들어 목이 길게 늘어나있고 전체적으로 야윈 몸들이자 얼굴의 어느 한 부위가 빠져나와있는 그림의 경우, 그 구멍 뚫린 얼굴은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상처를 연상시키며 공허함을 안긴다. 목이 길게 늘어난 몸들은 도달할 수 없는,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을 암시하는 것도 같고 불안하고 알 수 없는 내일, 혹은 희망을 찾는 현대인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사각형의 실내 공간(방/침실)과 그 프레임 바깥의 자연(나무)과 서로 얽혀있는 풍경은 도시공간에서 자연을 갈망하는 것을, 불임의 도시에 자연의 생명력과 치유력을 주술처럼 끌어들이는 상상력으로 힘껏 뻗어나간다.
작가는 주어진 일상에서 접한 것들, 우연히 자신의 눈과 마음에 들어온 것들에서 부단히 다른 것을 연상하면서 이를 이미지의 파편들로 집적시켜 구성해 올린다. 생각에 꼬리를 무는 것을 추적해나가는 것,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여러 형상, 수시로 출몰하는 잠재된 기억들, 이른바 트라우마나 은밀히 내재된 기억들을 그림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불현 듯 파생되는 여러 상념과 감각, 기억의 파편들을 한 자리에 구성해내는 이 그림에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낯선 감각과 사유를 발생시키는 효과적인 편집의 힘이 매우 중요해 보인다. 그것은 여러 예측할 수 없는 문맥을 만들어내는 일이자 묘한 감각의 충돌과 교차를 발생시키는 이미지의 전개를 시각화시켜내는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재현과 색채 역시 화면위에서 이미지의 구성과 편집이 은연중 야기하는 모종의 감각을 발생시키는 표면으로 밀도 있게 올라와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결국 회화란 표면위에서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굴절시키는 묘한 감각을 발생시키는 장소를 제공하는 일이다. 그것은 단지 특정 대상의 재현이나 묘사, 그림을 이루는 물질적 조건을 확인하는데 머물지 만은 아니다. 보는 이의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결정적인 공간을 가설하는 일이자 기존의 감각을 지운 자리에 낯설고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미묘한 감각을 발생시키는 것이 바로 그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연극적인 무대와도 같은 그림, 문장과도 같은 그림에서 핵심적인 것은 작가 자신의 삶에서 건져 올린 상상력과 감각의 온전한 자기화로서, ‘코스츔 같은 연출’이 아닌 지독하게 개인적이고 진솔한 그것에 가닿는 일일 것이다.

 

작가노트)
Super Happy
immersion
나무가 싹을 틔우는 이유는 꽃을 보기 위함인가?
분명 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만 그것만을 위해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꽃은 언젠가 떨어지고 더 이상 꽃을 볼 수 없어도 나무는 여전히 또 다른 싹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꽃은 그저 과정의 하나일 뿐 최종 목적이 아니다. 나무는 그저 자라고 있고 성장하는 것이다.
나도 또한 성장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 하고 싶다. 움직이고 변화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성장이란 어떤 목표나 이상에 도달하는 최종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걸 향해 나가는 모든 행위자체를 의미한다. 성장이라는 것은 과정이다.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해가는 과정 그 흐름에 올라타고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행위이다.
겨울이 온다고 싹을 틔우지 않는 나무가 없듯이, 삶의 마지막이 죽음인 것을 알지만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고 변화해야 한다. 성장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장만이 우리에게 지속가능한 ‘super happy’ 를 주기 때문이다. 꽃은 일시적이고 즐거움일뿐, 떨어지는 꽃에 초점을 두지 않아야한다. 성장은 선택이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지속적인 과제이고, 성장이 멈추는 순간 더 이상의 ‘super happy’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성장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자기몰입이다.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고 자기의식에 집중하는 깊은 몰입은 자신과 소통을 하게 한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깊은 소통을 통해서만이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다. 결국 자기몰입은 타인과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소통의 1차 도구 언어라고들 말하지만 언어는 적절하지 않다. 언어는 많은 경우에 거짓이 많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소통이 아니다. 말이 많아질수록 거짓대화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말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이 많아지면 거짓말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소통은 말은 자제하고 듣거나 본다. 성장을 위해 내면의 지긋한 몰입과 변화의 관찰은 소통의 시작이다.
나는 작업을 통해서 이러한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였고, 들여다볼수록 나에게 많은 결핍된 것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결핍의 종류와 정도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결핍되어있다. 돈의 결핍, 시간의 결핍, 공감의 결핍, 목표의 부재, 소통의 부재, 꿈의 부재, 의지의 부재, 이타심의 결핍 등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다.
목이 길어지고 구멍이 난 모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머리와 가슴의 사이에 있는 목은 변형되었다. 목은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짓는 곳이자, 교차하는 물리적 공간이다. 사회적 길들임과 원초적 본능의 사이. 이성과 감성의 거리이자, 동시에 통로이다. 이 두 요소는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저울질 하게 하고 최선의 선택에서 조차 ‘결핍’을 경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목이 긴 ‘결핍의 초상’은 감성과 이성의 갈등과 변화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충족되지 못할 결핍의 문제에 대한 나의 내면의 모습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결핍에 몰입함으로써 나를 채워가는 기분이다.
나에게서 시작해서 타인과의 교감으로 이어지고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더 나은 최선의 나를 만드는 것이다. 깊이 들어가는 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내가 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를 아는 것이 먼저이다. 몰입은 나와 나의 관계를 넘어서 세계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해가는 과정이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때, 나는 어깨에 짋어 진 묵은 짐을 내려놓은 후련함과 편안함이, 들은 이에게는 자신의 숨겨온 비밀도 입을 떼게 만드는 힘이 생기는 것처럼 이것이 결핍된 자신을 바라봄으로서 얻어지는 소통의 힘이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몰입을 통해 결핍된 자아를 마주하게 되고 타인과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이것은 나의 성장의 삶을 위한 선행과제이다.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과정이 성장이고 이를 통해자기해방과 ‘super happy’를 느끼게 되는 것, 이것을 위해 발자국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