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SPACE KC
임을 위한, Iron, 80x100x257cm, 2019
가스절단기를 도구로 철을 조각한다. 일반적으로 철판을 절단할 때 사용하는 가스절단기를 이용하여 두꺼운 철을 깎아 내고 녹여 통철로 이루어진 형상을 만들어 낸다. 가스절단기-철판을 재단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도구-를 이용하여 철 덩어리를 뜨거운 불길로 녹여내어 하나의 덩어리에서 형상을 만들어낸다. 전통적인 조각적 방법을 통해 만드는데 이는 필요 없는 부분들을 제거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일반적인 전통 재료인 돌, 나무를 깎아 내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러나 철을 녹여내는 방식은 정이나 끌과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직접적으로 재료에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제거하는 방법과는 조금 다르다. 가스절단기는 산소와 LPG를 이용하여 불길을 만들고 철이 녹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고압산소 밸브를 열어 철에 순간적으로 고열을 형성해 녹여내는 것으로 재료와 도구사이에 불이 지나간 흔적이 생긴다. 이 흔적은 다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작품을 제작할 때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한 행위에 제한을 주게 되고 재료인 철은 이 불길에 녹여지면서 저항하게 된다. 재료와 작업하는 사람의 중간에 생기는 불의 공간은 의도하지 못하는 형태와 느낌을 형성하게 된다. 철은 물성 그자체로 있으려는 성질과 그 재료를 다듬으려는 제작자와의 투쟁이 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만들기 위해 철을 깍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형태를 형상화시켜 의도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낯선 ‘무엇’을 만들어 낸다. 철이라는 강한 물질에 직접적인 힘을 부여할 수 없고 어쩌면 제 3자 입장일 수밖에 없다. 가스절단기에 의한 철의 조각은 철에 작업자의 물리적인 힘이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못한다. 불이라는 뜨거운 열기를 통해 깎고 녹여내기 때문에 형태를 제어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이런 방법적인 한계가 오히려 작업을 찾아가는데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철과 작업자 사이에 다른 무엇인가가 작업을 이끌고 그 속에서 ‘나’를 버릴 수 있게 만든다.

나의 작업은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목적을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do'-움직이는 것, 그저 행하는 것-그 자체이다. 그것은 완성이 아닌 기나긴 과정이며 움직임 자체이며 움직임이란 노동이 아닌 말 그대로의 움직임이다. 작업은 계속 움직이는 것이며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부산물-결과물과는 의미가 다르다-이 생긴다. 그 부산물은 미추, 행, 불행, 좋고 나쁜 것과는 다른 그 자체의 부산물이다. 나의 작품은 모든 진행의 부산물로 나온 것들이다. 부산물로서의 인체조각, 그것이 스스로 살아 움직여 보는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길 기대한다. 사람의 형상을 표현하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어떤 무언가를 찾고자 하였다. 손, 발, 다리, 머리, 몸통 등 익숙한 형태 속에 살고 있는 다른 것. 그것 일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익숙하면서 낯선 그 무엇을 찾을 필요가 절실해졌다. 낯선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알 수 없는 무엇을 자극하고 이 낯선 무엇은 다시 익숙해져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새삼스러움은 우리의 잊혀져 왔던 느낌일 수도 있고 잊혀져 왔던 생각일 수 도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가 작품 존재 가운데 머물고 또 그렇게 느낄 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작품이 가장 작품답게 존재하는 순간이다.

연작은 원과 그 안의 댄서가 만나 이루어진 작품이다. 원과 인체는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다. 마치 태아가 엄마의 자궁과 탯줄로 연결되어 있듯이 연결된 생명체이다. 원은 생물이며 살아있는 존재이다. 춤의 형태, 인체의 동작에 따라 원의 모습은 변형된다. 원의 내부는 막 화산이 폭발하여 끓어 넘치는 용암의 형태를 띠기도 하며 잔잔한 물결이 이는 바다가 되기도 하며 큰 바위얼굴 같은 옆얼굴로 댄서를 바라보기도 한다.
원은 말 그대로 동그라미이다. 동그라미는 움직임에 자유롭다. 사각형, 세모와 달리 모남이 없는 형태라 구르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 구르다가 어떤 포즈에서 멈추든 상관없다. 발을 착지한 상태이든 머리를 아래로 둔 상태든 그게 모두 완전한 형태가 된다. 원을 통해 동작의 여러 형태를 하나의 작품 안에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원은 춤을 좀 더 자유롭게 해준다. 중력에 의지하기 위해 발을 땅에 붙이지 않아도 된다. 손끝하나 머리, 발하나 어느 부분이든 원과 맞닿아 있음으로 댄서는 좀 더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다. 또한 원과 인체의 날렵한 선 사이로 보이는 비어 있는 공간이 감상자의 시선을 잡는다. 비어 있는 공간을 가만히 응시하면 작품에 대한 새로운 감성이 눈뜸을 느낄 수 있다.

작품 중에 <다리>만 뚝 떼어 만든 작품이 있다. 예전 운전하는 도중 다리 통증이 끊임없이 와서 잘라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당연시 되는 신체의 일부분인 ‘다리’, 그것은 고통의 또 다른 모습처럼 보였다. 고통이 그냥 참기 힘든 그 무엇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의미를 성찰해 보는 것, 그것이 인생의 과정이다. 인생의 끊임없는 고단함, 그것은 꾸역꾸역 밀려드는 마음 속 검은 흙탕물과도 같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인생은 누구에게나 참 힘들기 그지없다. 그 속에서 마냥 힘들어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의미를 찾고 세상에서 본인의 위치를 묻고 또 물어야 하니 그게 모든 현존재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