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SPACE KC
올 그림의 의미와 그 확장 가능성
김영호(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박재영의 작품 제작과 해석을 위한 키워드는 ‘올’이다. 실의 가닥을 뜻하는 올은 천을 이루는 단위이기도 한데 그것이 박재영의 작품에 등장하게 된 것은 포목상을 경영하고 있는 가정에서 성장한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좀더 부언하자면 일상에서 접했던 올의 형태나 구조에서 어떤 미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2004년에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 ‘반복된 선들의 집약구조를 통한 천 이미지 연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올을 그리는 행위가 삶의 과정을 현재의식과 결합시키는 일이라 밝힌다. 즉 그에 있어 천의 이미지는 매듭지고 풀리고 엉키고 감싸주는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한편 그의 논문은 작품제작의 방법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하여 대상 이미지를 채취, 분할, 확대하고 거기에다 다양한 회화적 방식을 실행하는 과정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인생이 짜여진 천과 같다면 일상은 천을 이루는 올이라 할 수 있다. 살아있음은 인생이라는 이름의 천을 짜는 일이며 육체와 정신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교차되며 개인사를 만들어 나간다. 이때 육체라는 씨줄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겪는 몸이 되며 정신이라는 날줄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된다. 박재영이 천착하고 있는 올 그림은 이렇듯 기호학적 해석의 방식을 적용할 때 확장된 의미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박재영의 그림은 예술=삶이라는 작품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위성을 지닌다. 그의 <올 그리기> 작업에 나타나는 반복적 그리기의 특성은 우선 대상의 사실적 묘사에서 시작하지만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실행하는 그리기 행위는 일상적 노동의 실천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며 결국 자신에게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형화면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신체적 고통이나 완성된 후에 접하게 되는 성취감은 곧바로 자신의 삶 즉 존재감을 확인케 하는 요인들이다. 또한 반복된 선들로 짜여진 천의 구조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정리토록 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박재영의 올 그리기는 삶이라는 실체를 반성하고 완성시켜 나가는 행위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실천과 사색의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모습은 가시적 대상인 작품을 통해 드러나며 예술은 곧 삶이 된다.
한편 박재영의 이러한 작품관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것이라면 그가 실천하는 조형방식은 상대적으로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가 된다. 그가 화면에 묘사한 단추나 단추 구멍 혹은 지퍼나 상표, 인조모피, 브래지어 끈 등의 이미지는 화면구성을 위한 자리매김이라는 측면에서 남다른 조형감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그 소품 오브제들은 작가의 개성적 그림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들이며, 작가는 연출가의 의도적이고도 세밀한 안목으로 그것들을 화폭에 배치함으로서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상황의 연출은 암시적이고 절약되어 있다. 우리는 이 절약된 상황 설정의 단서를 화면에 드러난 신체의 일부를 통해서도 재확인 할 수 있다. 밤하늘의 초승달처럼 화폭에 부분적으로 등장하는 얼굴, 목, 머리털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대형 화면에 비추어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익명적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는 박재영의 작업이 추상적 화면구성과 대상의 실재성 사이에 설정된 경계선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작품해석에 있어서도 양면적인 요소들을 모두 수용케 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연구할 필요가 있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박재영의 작업에 나타나는 특성의 다른 하나는 회화적 속성을 유지하려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디지털 매체를 보조적 수단으로 이용하면서도 대형화면을 선택하고 그리기의 수고를 감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손작업의 가능성과 그 의미에 충실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각과 연관시켜 볼 때 그의 작업을 위한 밑그림의 흔적은 작품 해석에 새로운 감각적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흔적은 그의 그림이 단색 평면회화의 경향을 보이고 미니멀한 화면의 차거움에 근접해 감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홀하기 쉬운 회화성을 강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 흔적은 주로 연필 밑그림이나 긁어낸 선묘로 나타나는데 이는 작업의 프로세스를 암시적으로 연상케 하고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작가의 조형의도의 변화를 읽어내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