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SPACE KC
을 통한 새로운 관계의 모색, 공간과 시간의 멈춰진 독백
홍경한(미술평론가)
  1. 작가 국대호의 근작은 내적동기에 관한 막연한 불가능성과 가능성의 조합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 지시명사를 잉태하지는 않는다. 원색이 지배하는 색과 예민한 구성, 거칠거나 매끈한 마티에르의 가시성에도 불구하고 의도의 명료함은 표상의 불명확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지성에 의한 가상의 구축과 자유로운 감각이 동시에 열람된다.
사진에서의 보케(Bokeh) 효과를 가미한 듯한 그동안의 작업으로 볼 때, 그의 작품에서 목도되는 개념과 감각적 표출은 매우 고의적인데, 이는 병렬하는 공간, 시간의 누적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시공함축의 의미로서 해석 가능한 스트라이프(stripe)는 현상의 일상성에 수용되지 않고 영속적 계기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한다.
그의 근작들에서 발견 가능한 흥미로운 지점은 (눈으로도 확연히 파악할 수 있듯) 통일과 체계를 건설하는 이성적 지도와 내외적 감각의 일치가 묘한 질서 아래 놓인다는 데 있다. 일례로 선을 긋는 작가의 행위는 신체성의 규정이자 경험으로, 파악한 대상 혹은 현상을 내화시켜 드러내는 외적감각으로 읽을 수 있다. 그건 달리 말해 정신으로부터의 동기이다. 즉, 정신의 작용이 신체화 되면서 내면감각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감각은 정신의 모든 것에서 미끄러지고, 대상을 선택 및 분별하여 이미지화하는 선명한 감성체계는 이성의 운용과 개념의 자기 존재를 부상시킨다. 물론 이 존재는 작가의 행위로 인해 물리적 에너지와 표출의 관계를 생성하며, 내부와 외부, 동기와 결과로 이중화-합일함으로써 시각적 성과로 매듭지어진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여러 작품들, 즉 단순히 색상 줄무늬에 국한될 수 없는 그의 연작들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물감의 밀도와 속도, 규칙성이 각각인 이 작품들은 응축과 함축의 결을 보유한다. 과거 대비 사실성을 억누른 탓에 인식의 친절도는 낮아졌지만 되레 감각반응은 높아졌다는 특징이 있다. 흔히들 ‘색(色)’부터 말하겠지만, 굳이 순위를 따지자면 필자는 다소 다르다. ‘색’ 너머의 가치, 단순성을 통한 현실 너머의 세계로 유도하는 길이 먼저 보이고, 근원성에 보다 무게가 있음을 읽는다.
  1. ‘색’이상의 언어들로 채워져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대호의 작업에서 눈에 띄는 조형요소는 ‘색’이다. 1990년대 말부터 그는 유독 ‘색’에 천착한 작품들을 발표해 왔는데, 초기의 색채추상에서부터 선과 에너지의 조응이 인상적인 색채드로잉(이 작품들엔 정갈한 격렬함과 힘센 고요가 녹아 있다), 그리고 오늘날 선보이고 있는 컬러라인 작품들 모두 색에 대한 관심이 깊게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2000년대 중반 선보인 ‘도시 풍경’ 연작에서도 색은 중요한 조형언어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그가 ‘색’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근원성에 대한 도전을 꼽을 수 있다. 시각예술을 말할 때 가장 앞서 언급되는 요소는 점과 선과 면인데, 이 조형요소들은 잔상에 맺힌 3차원을 2차원의 평면에 추상화(化)하는 신조형주의자들에게서 자주 엿보이는 방식이다. 그들은 순수조형의식을 생성하려는 의지로 대상을 점, 선, 면으로 단순화했고, 형태를 해체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국대호도 그렇다.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만으로 사물의 본질(essence)을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지닌다. 다만 국대호의 경우 경험적 프레임에 의탁함으로서 자연스럽게 공간과 사물을 포박, 600년 미술사가 고수해온 수학적 태도를 지양했다는 차이는 있다. 인위적인 꾸밈이 아닌 체득의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90년대 이후 여러 구상적 풍경을 비롯해 묵직한 질감이 시선을 사로잡는 <자작나무> 시리즈, <Jelly Bean> 연작 등, 다양한 형상작업을 펼쳐왔음이 사실이다.
국대호 작가가 ‘색’에 천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설명의 불필요함에 대한 자각이다. 즉, 형상으로 인한 인식의 통제와 제어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의 일환으로 선택된 것이 ‘색’이다. ‘색’은 그에게 가장 열린 수단이며 공명의 방안이다. 사유를 확장시키는 촉매다. 과거 일련의 작품에서 살필 수 있었던 구상적 익명성을 더욱 극대화한 장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에게 ‘색’은 단지 광학적 현상이 아니라 심리적 운용에 가깝다. 물리학에서 색채란 빛 에너지이지만 그에겐 감정의 표현이다. 감각을 통한 색의 도모-이성과 감성의 결합은 그에게 결국 같은 콘텍스트다.
  1. ‘색’에 관한 국대호 작가의 지속적인 눈길은 일정한 성과를 담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 그는 색채드로잉을 하나의 공간설치작품처럼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지난 2월 7일부터 두어 달 간 환기미술관에서 이어진 전시에 작가는 20여 년간 채집한 색의 흔적들(컬러필드) 230여개를 화이트큐브에 집대성했다. 색을 통한 공간과 색, 회화와 설치, 개별과 합이라는 전시의도를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야말로 ‘국대호의 색·채·집’이라는 전시제목과 효과적으로 맞닿았다.
국대호 작가는 지난 3월부터 이 주 정도 진행된 ‘예술의 기쁨’(김세중기념사업회 복합문화공간)에서의 전시에 ‘스트라이프’ 작업들을 주로 선보였다. 그 작품들은 본 글에서 몇 차례 강조한 ‘병렬하는 공간과 시간의 누적’이 담긴 것이었다. 언뜻 색의 분할이자 질료의 질서였지만 층위를 달리한 채 사물과 현상을 투사한 것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축을 걸어놓은 것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이 작품들이 국대호 작업의 향후 변화를 알리는 나침반과 같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작품 자체는 자신의 이성과 감각으로 끌어 올린 미의식의 적절한 발현이라 해도 그르지 않으나, 세상 수많은 사물과 현상들(그것이 풍경이든 관념적 대상이든)이 하나로 포개지며 원래 실체를 알 수 없는 추상화로 전이됨으로서, 시공에 놓인 고유한 정체성을 ‘새로운 관계’의 선상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눈으로는 확인 불가능하지만 명료한 한 가지는 있다. 바로 ‘색’으로 ‘색’을 찾는 게 아니라 사물에서 본질을 찾으려는 철학이 이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색’은 그저 그 근원에 대한 탐구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공간과 시간의 멈춰진 독백이라 부른다. 얼마 전 작업실에서 접한 그의 근작들은 내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